살인사건 현장을 모형으로…과학수사 기여한 최초 여성 법의학자
2017년 10월, 미국 스미소니언 박물관에서 '그녀의 취미는 살인'이라는 제목의 특별한 전시가 열렸다. 전문가들에 의한 보존 작업을 거쳐 대중에 처음 공개된 그녀의 공예품을 보기 위해 당시 박물관 역사상 두 번째로 많은 관객(10만 명 이상)이 전시장을 찾았다.
이 공예품은 '과학수사의 어머니'로 불리며 미국 법의학 발전에 기여한 최초의 여성 법의학자 프랜시스 글레스너 리(1878∼1962)가 만든 것이다. '의문사에 관한 손바닥 연구'로 알려진 이 디오라마(축소 모형)는 처음에 20개였으나 일부가 손상돼 살인 사건 세미나 등 현재 경찰관 교육용으로 쓰이는 건 18개다.
미 메릴랜드주 수석 검시관실 공공정보관인 브루스 골드파브는 최근 번역 출간된 '아주 작은 죽음들'(알에이치코리아)에서 디오라마에 얽힌 이야기를 비롯해 리의 일대기를 시간순으로 조명한다. 자신이 아니라 법의학에 관심을 가져달라는 리의 바람에 따라 그녀의 이야기는 그간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리는 과학수사 초창기인 1930년대 하버드대에 최초로 법의학과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녀는 의학과 범죄 사건 수사에 관심이 많았고, 독학으로 법의학을 공부했다. 법의학은 법학, 의학, 경찰 세 분야가 모두 탄탄해야 한다는 생각을 토대로 경찰 교육 세미나를 열고 디오라마도 만들었다.
51살에 건강이 나빠져 개인 치료 시설에 입원한 리는 자신처럼 치료를 위해 입원한 오빠의 대학 동창이자 검시관인 조지 버지스 매그래스(1870∼1938)와 소통하며 디오라마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는다. 매그래스가 배심원들에게 증거를 설명할 때의 어려움을 토로하자 리는 작은 방 모형이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의견을 낸다.
시카고 교향악단과 플론잘리 사중주단 모형을 만든 적 있는 리는 생각을 구체화해 범죄 현장의 모습과 시신을 그대로 배치한 모형을 만든다. 1대 12라는 축척에 맞춰 총격, 둔기 공격, 자연사, 익사, 방화 등 여러 현장을 구현한다. '인형의 집'으로 폄훼되지 않기 위해 리가 최대한의 노력과 비용을 들인 모형 하나의 가치가 최대 8만 달러라는 분석도 있다.
저자는 리의 말을 인용해 "이 모형은 누가 범인인가를 나타내는 게 아니다. 그냥 들여다보기만 해서는 사건을 해결할 수 없다. 관찰과 해석, 평가, 보고 연습을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또 직감 등에 따른 성급한 결론이나 경솔한 판단을 내려놓고, 최대한 미세하게 촉각을 곤두세워야 한다고 강조한다.
책은 1944년 미국에서 일어난 약 28만3천 건의 의문사 중 1∼2% 정도가 자격을 갖춘 검시관의 조사를 받았다는 통계를 제시하며 코로너(coroner)와 검시관(medical examiner) 제도의 차이도 비교한다.
중세 왕실 사유재산 관리인으로서 갑작스럽거나 부자연스러운 사망 사건 조사도 맡은 코로너의 비전문성을 지적하며, 코로너를 검시관으로 대체하고 의문사 조사를 현대화하려는 게 리의 목표였다고 설명한다.
책에 따르면 리의 노력이 많은 발전을 가져왔지만, 미국에서의 법의학 연구 환경은 여전히 척박하다. 2천342개의 독립된 사망 사건 수사 시스템이 작동하지만, 의문사 수사 방식에 관한 연방법이나 전국 표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원과 예산 부족, 훈련이나 업무 기준 준수 부족, 지원 부족 등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다.
그런데도 저자는 리의 노력을 높게 평가한다. "리는 다큐멘터리와 그림책, 시집, 유명 법의학 TV 드라마의 주제가 됐지만, 그녀의 인생에 관한 이야기는 다뤄진 적이 없었다. 그녀는 변화를 만들어낸 인물이었고 개혁자, 교육자, 법의학의 수호자였다."
법의학자인 유성호 서울대 법의학교실 교수는 추천사에서 "모든 시작에는 평생을 바칠 만큼 열렬한 누군가의 헌신이 있다. 우리나라 법의학의 태두 문국진 교수와 리의 공통점을 본다"며 "한 사람이 흘린 땀과 나아가려는 힘이 사회를 얼마나 바꿀 수 있는지 새삼 깨닫는다"고 말했다.
강동혁 옮김. 408쪽. 2만2천원.
손화연 기자 / 더인사이드뉴스